'소명 라이프 빌더'라는 좋은 빌더를 개발하신 황병구님께서 기고한 글입니다.
정말 시간관리의 목적이 무엇인지 근본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주옥같은 글이라고 생각됩니다.

세월을 아껴야 하는 진짜 이유

- 성공하는 사람들의 시간관리법을 부러워하는 이들에게 -


황병구(한빛누리 본부장, 본지 편집위원)



고지론과 청부론 그리고 시간관리


        우리 모두는 시간과 재물에 있어서 청지기라는 정체성을 부인할 수 없다. 더욱이 각자의 생애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공평한 자산인 ‘시간’을 성실하게 관리하는 것은 모든 이들에게 강조해야 마땅하다. 나 역시 여러 기회를 통해 ‘긴급한 일’보다 ‘중요한 일’에 우선권을 두어야 하고 그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기준은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맡기신 소명으로부터 견주어야 함을 누누이 배우고, 때론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나 누구도 시비 걸지 않던 이 자명한 명제 속에, 심각한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너무 도발적인 것일까? 자문해 보자. 시간을 꼼꼼히 관리하고자 하는 동기가 한정된 시간 안에 더욱 많은 과업을 행하기 위한 것이라면, 이는 마치 재물을 악착같이 모아서 남보란 듯이 부요하게 살고자 하는 것과 유사한 것 아닌가? 혹시 성공을 위해 자기를 철저히 관리하는 프로들에 대한 부러움이 시간관리의 동기는 아니었던가?

        결국 시간이든 재물이든, 심지어 내가 가진 고유의 은사든 그것을 관리하고 계발하고 발휘하는 과정의 끝에는 나 자신의 세속적 성공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돌아보아야 한다. 고지론과 청부론이 그 고유의 건전한 동기를 왜곡하는 이들을 통해 오용되듯, 시간의 청지기라는 고귀한 가치가 성공지향의 세속적 시류에 휘말릴 수도 있다.



알뜰과 검소의 차이


        한때 구호단체의 간사로 일했던 내 아내는 이따금 후배 청년들의 모임에서 ‘검소한 생활양식(Simple life style)’에 대해 강의를 했던 적이 있었다. 아내는 내게도 강의 내용에 대해 이모저모 상의하곤 했었는데, 당시 우리 부부가 흥미롭게 정리했던 대조적인 개념을 소개하고 싶다. 그것은 알뜰과 검소의 차이에 대한 것이었다. 두가지 단어 모두 절약이라는 공통적인 덕목을 내포하고 있지만 그 방향성에서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것이었다.

        알뜰하다는 것은 나 자신의 미래를 대비하고 무언가 나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현재의 욕구를 조절하는 것이라고 정리했다. 예를 들면 좀더 큰 집으로 이사 가기 위해서 청약상품에 가입한다든지, 유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투잡을 뛰거나 한동안 외식을 줄이는 긴축가계를 운영하는 등의 행위를 수식할 수 있는 단어가 알뜰이다. 절약의 종착점에 있는 사람은 바로 나이며, 절약에 대한 동기를 부여하는 것도 나의 업그레이드다.

        반면 검소하다는 것은 알뜰과는 달리, 무언가를 준비한다는 것과는 관계없이 삶 자체가 간소하기에 굳이 절약할 의지를 발휘하지 않아도 가장 적은 비용이 드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라고 정리했다. 물론 가난하거나 궁색하기에 소비력 자체가 아예 없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검소하다는 것은 내게 주어진 몫에서 이미 상당한 부분을 의미있게 나누었기에 내가 사용할 수 있는 몫 자체가 적은 상태라는 것이다. 이는 많이 벌어서 기부를 많이 하기에 자신을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적은 지출을 한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삶 자체가 성공지향적이지 않고 나눔지향적이기 때문에 돈벌이에 투자되는 시간과 노력보다 주변을 돌보는 부분에 나누어지는 시간과 노력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현상으로도 볼 수 있다.

        우리 부부는 알뜰한 삶은 결코 심플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알뜰한 삶은 한푼이라도 아끼기 위한 더 복잡한 가격비교와 조건비교가 동원되는 삶이며, 미래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일분일초도 허비해서는 안되는 빡빡하고 복잡한 삶이 될 가능성이 많다고 판단했다. 한편 만일 우리의 삶이 진정 심플해져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목적에 집중하는 삶을 살게 된다면, 이는 자연스럽게 검소한 삶이 되며, 나의 소유에 연연해하기보다는 세상의 필요에 함께 공감하는 삶으로서 하나님의 기준에서는 훨씬 더 건강한 삶이라는 나름의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시간은 결코 관리되지 않는다


        우리가 시간을 내게 되는 기준은 바로 자기 가치관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자기의 세계관과도 맞닿아 있다. 내일 중요한 시험을 앞둔 남자 대학생이 오늘 만나지 않으면 헤어질지도 모르는 여자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비단 이런 경우를 예로 들지 않더라도 우리는 어떤 이와의 만남은 선약을 핑계로 미루고 싶고 어떤 이와의 만남은 선약을 취소하고라도 달려나가고 싶다.

        시간은 결코 관리되지 않는다. 시간은 독립적으로 흘러간다. 시간은 4차원 시공간계에서 하나의 절대축이고 여기서 우리 삶의 흐름은 종속변수이다. 다만 관리되는 것은 우리의 행태와 선택이다. 그리고 우리의 행태와 선택을 좌우하는 것이 마치 우리의 지적 판단이나 의지인 듯 싶지만, 기실 따져보면 우리의 숨은 감정이나 욕구일 때가 더 많다. 재정과 유사하게 시간에 대해서도 알뜰과 검소의 잣대를 적용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미래의 성공을 위해 자신을 업그레이드하려고 주어진 시간을 쪼개 쓰고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지만, 어떤 이들은 이미 많은 시간을 의미있는 곳에 나누었기에 남은 시간을 효율적으로 써야만 한다. 우리는 어떤 부류의 사람들인가?

        자신을 잘 관리하기 위해 시간관리강의를 듣거나 프랭클린플래너 등을 만지작거리기 전에 해야할 일은 명료하다. 우리의 숨은 감정과 욕구, 그리고 정직한 동기에 대해 점검하는 것이다. 혹 불순한 동기에도 불구하고 세속적으로 성공하는 이들을 향한 시샘과 경쟁심으로 조밀한 시간관리의 바다로 뛰어든다면 아마 그 삶은 더욱 복잡해지고 본래의 질서를 잃게 되어서 시간관리를 중도포기하거나 혹 계속하더라도 시간의 노예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세월을 아껴야 하는 이유


        말씀에 기록된 바대로 때가 악하기 때문이다. 결코 우리의 삶이 유한하기 때문도 아니요 그러기에 효율적인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도 아니다. 우리는 영원한 삶에 맞닿아 있기 때문에 이 땅에서의 삶으로 승부를 보는 사람들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도 영원한 삶을 맛보라고 하셨지 영원한 삶을 준비하기 위해 치열하게 시간을 쪼개 쓰라고 하시지 않으셨다. 때가 악하기에, 즉 우리로 영원한 삶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고 이 땅에서의 나 자신의 성취와 야심에 집중하게만 만드는 너무도 많은 공격들이 있기에 우리는 세월을 알뜰하게 아끼지 말고 검소하게 아껴야 한다.

        세월을 아끼는 데에 발휘해야 하는 지혜는, 하루를 계산하고 자투리 시간을 배분해서 일주일, 한달, 일년을 짜임새 있게 구성하는 알뜰한 기술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시간들을 어떤 이웃들과 어떻게 나누어야 하는지, 그리고 이를 위해 내게 어떤 희생과 헌신의 대가가 따라오는지 계수하는 검소한 지혜이다. 그리고 그 대가를 기쁘게 치르기로 기꺼이 순종하는 심플한 용기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조심하여, 지혜롭지 못한 사람처럼 하지 말고 지혜로운 사람처럼 하십시오. 세월을 아끼십시오. 때가 악합니다.” (엡5:15~16, 공동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