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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8.26 노장우대-혈연주의, 이상한 나라의 AC 밀란

경로우대제, 패밀리 패키지, 재취업 교육… 특정 국가나 기업의 복지 정책 얘기가 아니다. AC 밀란이라는 세계적인 명문 클럽이 최근 몇 년간 고수해 온 선수단 운영 방식을 설명할 수 있는 주요 키워드다.

밀란에게 세대 교체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은 이미 2004/2005 시즌이 끝난 직후부터였다. 하지만 밀란의 주축 선수들은 2002/2003 시즌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할 때의 멤버와 별반 차이가 없다. 감독도 여전히 카를로 안첼로티다.

물론 올 여름에는 카푸, 세르지뉴 같은 노장 선수들과는 작별하고, 우루과이 유망주(티아스 카르다시오, 타바레 비우데스)들을 비롯해, 지난 시즌 장족의 발전을 보인 24살의 미드필더 마티유 플라미니 등을 영입하며 젊은 피를 수혈했다. 이것만 보자면 어느 정도 밀란의 팀 개편 의지를 엿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와는 정반대로 이해할 수 없는 영입도 여전히 존재한다. 예전같지 않은 호나우지뉴, 지안루카 잠브로타를 바르셀로나에서 데려온 데 이어 밀란을 버리고 떠난 뒤 첼시에서 먹튀로 전락했던 안드리 솁첸코의 복귀까지 받아들였다. 이 쯤 되면 밀란이라는 팀의 내부에 흐르는 정서와 생각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투철한 베테랑 우대 정서

밀란은 올 여름 적지 않은 선수들의 이동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베르트 팔로스키가 다른 팀으로 임대를 간다는 가정 하에 밀란 1군의 평균 연령을 계산하면 29.2세가 나온다. 지난 시즌 영입됐던 브라질 출신의 촉망받는 공격수 파투와 밀란의 최고참이자 살아 있는 전설 파올로 말디니의 나이 차는 무려 21살!

물론 베테랑의 경험은 무시할 수 없는 요소다. 단순히 힘과 스피드에만 의존하지 않고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 삼아 경기를 좀 더 노련하게, 효율적으로 풀어갈 수 있다는 점이 노장 선수들의 최대 장점이다. 그러나 경험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몸이 마음을 따라가지 못하고 부상도 잦아진다. 지난 시즌 챔피언스리그 아스널전이 밀란의 현실을 직시시켜주는 참고서였다. 당시 밀란의 노장 선수들은 젊고 패기 넘치는 아스널 선수들을 상대로 수비진에서 공을 걷어내기에만 급급했다.

아스널은 30대를 코 앞에 두고 있는 선수들과의 계약에 있어 지나치게 야박한 것으로 유명하다. 반면 밀란은 베테랑 선수들을 존중한다는 차원 하에 기량이 한창 쇠퇴한 30대 선수들조차 잘 내보내지 않는다. 축구판 '경로우대제'라 할 수 있다.

밀란이 역습에 나설 때면 전방에는 늘 원톱과 카카 단 두 명 뿐이고 공격에 가담해 들어오는 미드필더는 없었다. '성난 황소' 젠나로 가투소는 한해 한해 지날 때마다 활동량이 현저히 줄어드는 모습이고, 수비수들은 잔부상에 시달리게 되면서 실수도 많아졌다. 골키퍼도 지다, 크리스티안 아비아티, 젤리코 칼라치 중에 믿음이 가는 선수가 단 한 명도 없다.

혈통주의와 인맥이 통하는 밀란

지난 6일 밀란의 영입 명단에는 체드릭 세도르프라는 다소 뜬금없는 선수가 등록됐다. 어디선가 낯이 익은 이름. 그렇다. 그는 3개 클럽에서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차지한 정상급 선수 클라렌세 세도르프의 친동생이다.

반면, 그의 동생 체드릭은 형의 명성에 전혀 미치지 못한다. 한때 레알 마드리드, 인테르 유스팀에서 뛰기도 했지만, 지금은 25살의 나이에 벨기에 2부리그 팀에서도 퇴출된 선수다. 이런 선수를 밀란이 영입했다는 것은 클라렌세의 입김이 작용했다고 밖에 할 수 없다.

이 같은 사례가 처음이 아니다. 2004년에는 세도르프의 친구 하베이 에사자스와 계약을 한 적이 있다. 에사자스는 무려 3년 동안 축구를 하지 않았던 선수. 단기간 체중 감량 끝에 밀란과 계약을 했지만, 결국 밀란서 단 한 경기도 뛰어보지 못했다.

같은 해에는 카카의 동생 디강을 영입했다. 그는 곧바로 하부리그 리미니에 임대된 뒤 지난 시즌 밀란에 복귀했다. 하지만 출전 기회를 거의 잡지 못했고, 코파 이탈리아 경기에 나올 때면 늘 실점의 빌미가 됐다. 결국 디강은 스탕다르 리에주로 임대됐다.

이렇게 심신에 지친 선수들의 마음을 가족이나 친구의 영입으로 달래주기 위한 밀란의 복지 정책은 참으로 눈물겹다. 더군다나 디강의 연봉은 무려 100만 유로(약 16억원)다. 행여나 카카가 이적을 할까봐 그의 마음을 붙잡고자 디강에게 굉장히 신경을 쓰고 있는 셈이다.

재활공장, 'AC RECYCLE'?

밀란이 올 여름에 영입한 잠브로타, 호나우지뉴, 솁첸코는 모두 기량 면에서 '분명히' 하락세에 접어든 선수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란은 망설임 없이 이들의 클래스와 갱생을 믿는 모양이다.

잠브로타는 그렇다 쳐도 호나우지뉴는 상당히 도박성에 가까운 영입이다. 호나우지뉴는 최근 2년간 바르셀로나에서 프로선수 답지 않은 선수와 사생활로 언론의 도마 위로 자주 올랐다. 이로 인해 그에게는 문제아를 뜻하는 ‘검은 양’이라는 별명까지 생겨났다.

호나우지뉴는 이적하자마자 밀란 선수들과 호흡을 맞춰보지도 않고 곧장 베이징 올림픽에 참가했다. 그는 아르헨티나와의 준결승전에서 또 다시 왼쪽 측면에만 박혀 있었다. 수비를 휘젓는 움직임은 없었다. 지난 시즌 바르셀로나에서 비판을 받을 때와 전혀 달라진 게 없는 플레이였다.

더욱이 호나우지뉴는 카카와 함께 대표팀에서 뛰면서 좋은 경기를 펼친 적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선수 모두 왼쪽과 중앙을 커버하며 뛰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동선도 겹친다. 아마도 호나우지뉴의 영입은 안첼로티 감독이 원해서가 아닌, 밀란의 소유주이자 이탈리아 총리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추진한 게 아닐까.

솁첸코의 복귀도 다소 납득이 안 된다. 그는 밀란을 저버리고 떠난 선수인 데다가 실력도 예전같지 않다. 솁첸코의 입성으로 팀내 유망주 공격수인 팔로스키는 다른 팀으로 임대갈 처지에 놓였다. 어차피 솁첸코도 이제는 주전이 힘들텐데 같은 벤치 멤버라면 미래가 밝고 연봉도 싼 팔로스키가 낫지 않을까.

과거 밀란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던 아리고 사키 전 감독은 “타겟 스트라이커 영입한다더니 호나우지뉴 데려오고, 수비수 영입한다더니 솁첸코 데려온다. 이것은 안첼로티 감독을 시험하는 것 밖에 안 된다”며 구단 수뇌부의 행태를 지적했다. 이렇게 원칙도, 경쟁력도 없는 밀란의 선수단 운영이 언제까지 통할지 매우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