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다 연말이 되면 사람들이 하나씩 챙기는 것이 있다. 1년간 벽에 걸어두고 세월을 읽어나가는 달력과 기억의 한계를 도와주는 다이어리다. 둘 다 비싸지는 않지만 연말 선물로 제값을 한다. 이처럼 요긴한 쓰임새 덕분에 세월의 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쓸모 있는’ 물건 자리를 지켜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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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76년에 창립해 올해로 27년째를 맞고 있는 양지사는 수첩과 다이어리 전문업체다. 수첩이나 다이어리를 써본 사람 중 ‘양지사’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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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나 되는 국내 시장 점유율이 양지사의 브랜드 파워를 증명한다. 뚜렷한 경쟁자가 없는 이유에 대해 이 회사 창업주인 이배구(62) 회장은 “다이어리나 수첩은 연말에 생산이 집중되기 때문에 1년 내내 공장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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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사는 다이어리와 수첩뿐 아니라 각종 노트와 금전출납부 등으로 생산 품목을 다양화했다. 판매처도 미국·유럽·일본 등 선진국으로 확대해 수출을 하고 있기 때문에 1년 내내 공장이 쉴 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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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카드회사와 신문사인 미국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와 뉴욕 타임스의 다이어리도 양지사에서 제작해 공급하고 있다. 지난해 수출은 1천5백만 달러(약 1백80억원)로 전체 매출 중 40%에 이른다. 국내 대기업과 주요 금융기관·관공서 등의 다이어리 역시 양지사의 공장에서 만들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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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사는 지난해(2002년 7월∼2003년 6월) 3백70억원 매출에 34억원의 순이익을 올렸다. 수첩과 공책류만으로 이룬 매출치고는 적지 않은 금액이다. 영업이익률도 10.5%에 이를 정도여서 어려운 제조업치고는 괜찮은 수준이다. 꾸준하게 기록하는 것이 다이어리의 강점이듯 양지사 역시 화려함보다는 꾸준한 성장을 계속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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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년 전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를 회상하면 감회가 남다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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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제품은 물론이고 다이어리라는 말조차 없었어요. 국내에 다이어리를 우리가 맨처음 보급했죠. 그 점에 대해서는 큰 자부심을 느낍니다. 그런데 이제 한물가고 있는 사업으로 취급받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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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첩 만들어 얼마나 팔겠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매출이 3백70억원 정도 된다고 하면 다들 화들짝 놀라죠. 반대로 거래선이나 문구업계에서는 우리 회사가 한 1천억원 정도 파는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어요. 둘 다 양지사의 모습이죠. 전자는 수첩이나 다이어리 산업이 이제 한물간 산업이라고 보는 것이고, 후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지사의 막강한 브랜드 파워를 인정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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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폰·PDA·컴퓨터 등 각종 전자기기가 수첩 역할을 대신할 것이라는 얘기가 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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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5년 전부터 사업에 정체가 온 것은 분명해요. 우리 회사도 매출이 감소하지는 않았지만 크게 늘지도 않고 있어요. 그러나 수첩이 없어진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전자수첩이니 PDA니 하는 것은 수첩의 일부 기능만 대신할 뿐입니다. 수첩처럼 간편하고 손쉽게 기록할 수 있는 도구는 아직 없습니다. 전자수첩과 PDA 등은 저장한 것을 불러내는 기능은 뛰어나지만 즉석에서 기록하기에는 불편합니다. 노트북은 아직 수첩에 비해 크기나 무게 등 여러 제약이 있고요. 당분간 수첩의 강점은 유지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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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국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다이어리가 일상화돼 있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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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국일수록 기록하는 문화가 발달돼 있지요. 당연히 다이어리나 수첩에 대한 수요도 많고요. 양지사가 수출하는 나라도 유럽과 미국·일본·호주 등 선진국에 집중돼 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비즈니스로 만나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바로 수첩을 꺼냅니다. 자기가 한 말도 기록하는 사람들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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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 비중이 높은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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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를 설립한 이듬해부터 수출하기 시작했어요. 당시에는 국내 수요도 워낙 적었고, 내수에만 의존하면 1년 중 아홉달은 공장을 놀려야 했으니까요. 지금은 수출이 전체 매출의 40% 정도 되지요. 액수로도 종이류 제품 수출 업체 중에는 가장 많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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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같은 연말에 가장 바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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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지금이 가장 바쁠 때죠. 1월만 돼도 국내 시장은 한가해집니다. 그래서 국내 시장만 보고 사업하면 다이어리 업체가 살아남기 힘들다는 겁니다. 연말에는 사람도 모라자고 공장도 모자라죠. 특히 한국이 더합니다. 미국이나 유럽의 대기업은 보통 6∼7월에 내년도 다이어리를 주문합니다. 그런데 한국 대기업들은 8월쯤에 계약하자고 하면 다들 ‘미쳤다’고 합니다. 여름도 다 안 갔는데 무슨 소리냐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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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달력 인심이 많이 줄어드는 것 같은데 다이어리도 마찬가지죠? 요새는 어떤 업체가 많이 사갑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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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 이후 기업체의 주문량이 현저히 줄어들었습니다. 최근에는 합병을 통해 몸집이 커진 은행들이 가장 큰 손님이죠. 어떤 시중은행의 경우 올해 주문량이 50만부 정도 되니까요. 한때 대우그룹이 잘 나갈 때 50만부까지 주문한 적이 있었죠. 그게 외환위기 직전인 96년이었습니다. 대우그룹은 창업 이듬해인 77년에도 1만부를 주문했습니다. 당시로선 엄청난 물량이었죠. 90년대 중반에는 대기업들이 경쟁적으로 주문했고요. 80년대에는 정치인들이 수첩에 자기 얼굴사진 넣고, 쓰고 싶은 말 다 써서 유권자들에게 돌렸습니다. 그때는 그게 불법이 아니었거든요. 선거 홍보용으로 그만한 선물이 없었죠. 박정희 대통령 때는 대통령용 수첩도 특별 제작했습니다.”

 

아무래도 다이어리도 가격 싸움인 것 같은데요. 한국 공장이 경쟁력을 가질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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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래도 중국과의 가격 경쟁이 매우 힘이 듭니다. 최근 3∼4년간 특히 어려웠고요. 수출도 상당 부분 정체되는 현상을 보였는데 올 들어 상황이 나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야 해외 고객들이 우리의 품질을 인정하기 시작한 거죠. ‘싼 게 비지떡’이란 말도 있잖아요. 중국이나 동남아시아의 싼 다이어리를 써보니 품질이 만족스럽지 않았던 거죠. 다이어리의 주 수입국가인 선진국의 눈높이를 맞추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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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공장을 계속 유지하겠다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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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공장은 일단 그대로 유지할 생각입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중국 시장을 외면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한국 공장은 지금처럼 국내 수요와 선진국 수출 물량을 담당하고, 중국에는 중국 수요를 맡을 공장을 지을 예정입니다. 이미 신사업 팀과 TFT를 꾸려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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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업으로 확장할 생각은 없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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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라도 제대로 해야죠. 양지사가 비록 작지만 수첩 업계에서는 세계적인 회사입니다. 업계에서 우리 회사를 모르는 곳은 아마 없을 겁니다. 저는 우리 회사를 ‘영업이 필요없는 회사’로 만들고 싶어요. 굳이 영업활동 안 하더라도 고객이 사고 싶은 제품을 만들 수 있으면 더 바랄 것이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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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말이겠지만 이회장도 다이어리 애호가다. 비서가 있지만 그는 모든 약속과 스케줄을 직접 기록한다. “다이어리를 쓰는 것도 중독현상이 있다”고 말할 정도다. 한번 쓰기 시작하면 더 많이, 더 자주, 더 꼼꼼히 기록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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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장은 “우리나라에도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 중 하나가 꼼꼼히 기록하는 것”이라고 했다. 기업체 사장이나 임원, 그리고 유명한 학자나 전문가들 모두 자신의 스케줄을 수첩에 꼼꼼히 적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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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해서 바빠졌기 때문에 꼼꼼히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꼼꼼히 기록하기 때문에 성공해서 바빠졌다는 얘기다. 또 그렇게 꼼꼼히 기록해야 머리를 기억력의 부담으로부터 해방시켜 창조적인 곳에 쓸 수 있기 때문이다.